[한겨레] 퇴행 정치와 패거리 집단의 횡포

kimmy
발행일 2024-03-03 조회수 111

세상 변하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따라가기 힘들 정도다. 최근 ‘2024 부산세계탁구선수권대회’를 시청하면서도 그랬다. ‘바나나 플릭’이라는 기술의 위력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예측불가능한 리턴 공격 기술인데,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이 기술을 습득한 선수들이 경기에서 우위를 점했다. 그런데 올해에는 국제탁구연맹조차 아직 명명하지 못한 신기술을 사용하는 선수들을 여럿 볼 수 있었다. 이처럼 스포츠 선수들의 피땀 어린 노력은 좋은 결과를 얻는다. 국민과 팬들도 이런 모습에 박수와 지지를 보낼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정치 현실은 어떠한가. 구태의연한 모습들뿐이다. 총선이 불과 50일 정도밖에 안 남았는데 정책은 상실된 지 오래다. ‘사람’을 둘러싼 공천 과정만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언론들도 쪼개지고 합쳐지는 정당과 정치인들의 발언들만 보여준다. 정치공학적 과정에만 초점을 둔 기사들이 난무한다. ‘국회의원’이라는 직업과 권력의 향유에만 관심이 있지 민주주의 발전이나 사회공동체를 위한 노력은 찾아볼 수 없다.

제3지대 정치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도대체 그들의 ‘정치’는 무엇인지 묻고 싶다. 지역구와 비례 의석에 대한 논의가 아닌, 철학과 지향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같은 정당에서 활동했다는 것조차 의구심이 든다. 국민과 유권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정당과 정치인이 없다. 민주주의와 정치체제에 대한 거대 담론부터 불확실성이 높은 시기 경제·외교와 과학기술에 대한 해법은 뭔지, 인구구조와 기후위기, 인공지능(AI) 기술의 발전에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듣고 싶다. 그러나 주요 언론조차 각 정당의 공약이나 정책을 질문하거나 다루지 않고 있다.

전공의 집단 이탈 일주일째인 지난달 26일 광주 동구 조선대병원 전공의 탈의실에 가운이 걸려 있다. 연합뉴스

최근 의사 증원을 둘러싼 의사들의 태도 또한 정치인들과 다르지 않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고민 없이, 오로지 집단이기주의의 극단화된 모습들만 보여준다. 진료 거부와 집단 사직서 제출 행태는 처음이 아니다. 2020년 9월, 코로나19 대유행 시기에 이어 두 번째다. 표면상으로는 교육 현실과 자유의지를 이야기한다. 심지어 병원을 떠난 이유로 “직장이 마음에 안 들어 그만두는 직업 선택의 자유와 정부의 핍박”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실 핵심은 노동시장의 수요 공급에 대한 불만 아닌가.

과거 로스쿨 논쟁 당시 법대생은 물론 법학 교수부터 대한변호사협회까지 똘똘 뭉쳤던 모습과 흡사하다. 두 집단 모두 노동시장의 공급 확대로 인한 경제적 불이익 때문에 반발한 게 아니었던가. 공급 과잉의 결과 ‘이윤의 몫’이 줄어들 것 같아서. 전 세계 어떤 의사들이 환자의 생명을 다투는 시각에 응급실까지 비워두고 집단행동을 할까. 소수 엘리트 집단이 기술 권력을 사유화한 결과다. 자본에 길든 극단화된 이익집단의 모습들만 난무하는 듯하다. 세상은 여전히 불평등한데 ‘납작한 공정’이나 ‘자유와 권리’만 주장한다. 직업윤리나 사회적 책무는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한국에서 태어난 것이 잘못일까. 이제라도 시민의 삶과 괴리된 정치집단과 사회적 규범조차 무시하는 특권집단에 대한 ‘사회적 판결’을 해야 한다. 학계는 물론 시민사회와 지역공동체 그리고 노동조합 등이 서로 협력해 시민적 통제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조직의 관행이나 절차 혹은 시스템과 같은 형식주의에 얽매여서는 그 길을 찾기 어렵다. 물론 한겨레와 같은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권력의 눈치 보지 말고, 감시자가 되어야 한다. 언론은 바쁜 나날 속에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펴볼 겨를조차 없는 시민들에게 그나마 깊은 성찰과 대안을 찾는 촉매자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열린편집위원의 눈] 김종진 | ​일하는시민연구소장

※‘열린편집위원의 눈’은 열린편집위원 7명이 번갈아 쓰는 글입니다.

 

https://v.daum.net/v/20240303183006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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